1. 어쩌면 진보의 과정이란 건 계량화, 수치화된 영역이 확대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세밀하게 수치화되지 않은 걸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심지어 내가 얼마나 매력있는 이성인지도 결혼정보회사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면 금방 점수화되는 세상이니까. 하긴 디지털의 세계가 0과 1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매트릭스' 속 사람들이 초록색 숫자들의 세계에 사는 것처럼 말이다. 수치화라는 건 대상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용이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분석이나 비교가 용이해진다는 건, 결국 예측의 정확성을 높여준다는 말일 것이다. 예측 가능한 영역이 넓어지고 예상이 가능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시간을 쪼개어 계량화한 시계의 발명을 근대성의 발로로 보는 식자들처럼, 예측 가능성이 란 건 현 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어쨌든 계량화 덕분에 지금의 세상은 뭐든 쉽게 예측이 가능한 사회가 됐다.

그런데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는 김빠지는 것처럼 예측이 가능한 건 뻔하고 재미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앞으로의 상황이 명확하지 않고 불확실할 때 궁금증이 유발되고 기대나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 도 마찬가지다. 뇌의 감정시스템은 불확실한 상태에서 쾌감물질을 방출시킨다고 한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진화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포츠를 본다. 일상에서는 느끼기 힘든 불확실성의 쾌감과 재미를 위해. 현대의 일상에서는 거의 모든 것들이 예상범위 내에 있지만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스포츠는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2. 스포츠의 영역에 계량화된 분석이 도입되지 않은 건 아니다. 야투성공율, 평균득점, 서브리시브율, 수비율, 출루율.. 우리가 즐겨보는 상당수의 종목 은 이미 숫자들에 잠식당한지 오래다. 폴 디포데스타의 머니볼 이론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건 야구에서 최소한의 직감, 주관적 판 단, 심지어는 스타플레이어까지도 통계학적인 숫자 앞에서는 온전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물론 야구는 턴turn을 기반으로 하는 스포츠라 축구와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

다만 많은 종목에서는 이런 숫자의 잠식이 상당 수준 진행된 데 반해, 축구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축구라고 통계학적 분석에서 자유로웠던 건 아니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이들이 축구에 물리적 데이터를 도입하려 했고 그 통계로 유효한 분석을 시도했다. 벵거, 코몰리, 앨러다이스 등.. 특히 앨러다이스가 상대 수비수마다 어느 방향으로 볼 을 걷어내는지 통계를 내고 그 위치에 선수를 배치시켜 세컨 볼에 대한 점유를 높였다는 사실은 놀랄만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들의 시도가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킬 정도로 획기적인 성과를 낸 건 아니다. 앨러다이스의 실험은 여전히 세트피스에 국한되어 있고, 그토록 센세이셔널했던 벵거는 어느새 10년 무관을 눈앞에 두고 있는 처지다. 코몰리 또한 앤디 캐롤이라는 희대의 오버딜을 남긴채 물러난 걸 보면 그 통계라는 게 신통치만은 않아보인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는 아이히만이란 사람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는 수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의 전범 중 한 명이었다. 태연히 수백만의 사람을 죽였던 경력을 생각한다면 그가 정신이상자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괴물의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만, 재판을 받기 위해 사람들에 공개된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한 인간에 불과했다. 수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의 심리 상태를 판정했지만 그의 정신적 상태는 ‘정상’을 넘어 ‘바람직한’ 성품을 보이기까지 했다. 더욱이 그는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를 갖고 있었거나 반유대주의 사상에 세뇌를 받은 상태도 아니었다.[각주:1]


재판의 참관인으로 참석하여 눈 앞에서 아이히만을 접했던 한나 아렌트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 동시에 무자비한 수백만(600만 명이라고 추산)의 학살자가 될 수 있었는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분석은 아이히만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근대 이성의 완성이 눈 앞에 있다고 여겨졌던 20세기 서구 사회에서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어떻게 가능했는 지, 즉 ‘악의 평범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자 고민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말’에 주목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언어가 매우 공허하고, 현실 인식에 심각한 괴리를 보이고 있으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하다고 분석했다. 아이히만이 나치의 언어 규칙을 철저하게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를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으로 불렀고, 학살은 ‘안락사 제공’, ‘최종해결책’ 등으로 명명했다.2 나치 수뇌부는 의도적으로 스스로가 만든 인공적인 표현을 전국가적으로 통용시켰다.


본래 정상적인 인간들에게 있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전쟁도 명분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전쟁이라는 공식적인 살인도 이를 정당화해주는 명분이나 구호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일방적인 학살은 더욱 그렇다. 2차 대전 말에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죄책감을 호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치의 언어 규칙은 무자비한 ‘범죄’를 불가피한 ‘의무’로 만들어주었다. 유태인 학살은 체계적인 업무 중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얼마 전 영화 ‘변호인’을 봤다. 보통의 한 대학생을 일순간 북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 간첩으로 만들어버리는 공권력의 무시무시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공안당국이나 사법부가 사용하던 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안당국이 통용하던 언어 규칙들, ‘국가 전복 세력’, ‘반국가단체’, ‘빨갱이’, ‘간첩’, ‘적화통일’. 유죄를 선고 받았던 당사자들은 실제 반국가단체를 조직하지도 않았고 국가 전복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들은 빨갱이도 아니었다. 모두 현실적인 판단 기준과는 거리가 먼 언어들이었다. 영화 속 변호인이 법정에서 울분을 토하는 이유도 현실과 언어 사이의 간극 때문이었다.





이는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기득권층은 사회의 건전한 비판 세력마저 ‘종북좌파’로 명명한다. 종북세력과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을 동일시 해버리는 사회의 언어 규칙 속에서 정당한 비판과 문제 제기마저 북의 지령을 받고 온 종북세력의 분열 조장으로 치부된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변호인에게 계란을 투척하던 할아버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멀쩡한 젊은이들을 상대로 종북 척결을 외치는 집회를 하고 계신다. 이들의 언어는 여전히 공허하다.


사실 언어는 현실을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에스키모인들의 십수 개가 넘는 눈에 대한 언어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를 통한 현실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현실 사이는 늘 벌어져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극을 인지하고 ‘사유’하는 것이다.3 아렌트는 언어와 현실 사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만이 악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라 강조했다. 이를 ‘두려운 교훈’이라 했다. 아이히만은 실제로 자신이 수행하는 임무가 안락사 제공인지 아니면 학살인지 의심하지 않았다. 때문에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종국에는 그마저도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아이히만이 학살자가 된 것도 80년대 무고한 대학생을 범죄자로 만든 것도 모두 ‘사유’가 결여된 까닭이었다.4 사진이라는 것도 대상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표상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렌즈나 필터, 필름에 따라 천차만별의 사진이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언어를 매개로 보는 세상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현실과 그 대상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할 수 있는 핵심이 되며,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타자와의 대화 속 언어는 전과는 전혀 다른, 현실의 힘을 담은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을 테다.




  1.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하나 새들의 고향 그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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